이토만시의 발자취

2013年2月1日

  1. 구스크의 발전과 남산의 흥망
  2. 근세의 마을
  3. 시구역의 재편성
  4. 행정의 변천
  5. 이토만 마을의 발전
  6. 이토만 어업의 발전
  7. 문중과 문중묘
  8. 오키나와 전쟁
  9. 깨진 기왓장 더미 속에서 이토만의 부흥
  10. 1초 3촌의 시기
  11. 합병 신 이토만초의 탄생
  12. 시제도 실행, 일본으로 복귀
  13. 제 4차 매립지와 새로운 전개
  14. 21세기를 전망하며

구스크의 발전과 남산의 흥망

이토만시의 발자취

 

이토만시에는, 현재 38곳의 구스크가 확인고 있습니다. 「오모로사우시」 에 의하면 「쿠메스요노누시」, 「이시야라요노누시」, 「야마키타라스사에」「야마쿠스쿠다다미키요」, 「후쿠시오와루요노누시 」, 「마카히오와루요노누시」,「아하콘노오오야」라고 하는 유력자들이, 각지에 구스크를 쌓아 각지역에서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모노요노누시」가 가장 강한 지배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자오사토에 있는 남산 구스크에는 오사토 안지를 시작으로 하는 우후 사토・오우오우소・타루미이로 지속해 왔던 남산 왕계가 있고, 그 지배는
「시모시모시리」라고 하는 카네구스쿠・오사토・마카베의 범위로부터, 점차 도미구스쿠・캰・마부니・코친다・쿠시카미・타마구스쿠・치넨・사시키・시마시오사토까지 미쳤습니다. 그리고, 오키나와 본토는 중산・남산・북산로 불린 3곳의 성이 세력을 겨루는 삼산 대립 시대에, 당시 우후 사토는 중산 이어 1380년에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무역을 전개했습니다.

「오오사토는 사토카라루, 카데시카와 이즈카라루」라고 불려진 카디시가는, 그 풍부한 수량으로 남산 성 아래 논밭을 비옥하게 하며, 남산 번영의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루미이는 그 강과 사시키의 쇼우 하시가 소유하고 있는 금박 병풍과 교환, 그로인해 신하들의 신망을 잃고, 결국 하시에 의해서 멸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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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의 마을

옛날 류큐시대의 구획도

写真 : 옛날 류큐시대의 구획도

 

이토만시의 행정구역은 「시모시마시리」「키야메」「마후니」라고
칭하였습니다.「시모시마시리」는 시마지리카네구스크, 시미지리오오자토, 시마지리마카비의 3곳으로 분할되었고, 시마지리오오자토의 촌은 1667년에 타카미네 촌이라고 개칭, 시마지리카네구스크 촌은 카네구스쿠 촌, 시마지리 마카비 촌은
마카베촌으로 개칭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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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역의 재편성

사츠마반 조정도

写真 :사츠마반 조정도

시구역의 마을은 17세기 후반의 촌을 경계로, 새롭게 변화 하였습니다.
카네구스쿠 촌은 토미구스쿠 촌에서 타케토미・나미히라・아하곤 3곳을 편입하여, 나카구스쿠・사키나카구스쿠를 타카미네 촌으로 이시키・아라카키 두곳을 마카베 촌에 보내고, 타케토미・나미히라・아하곤・카카즈・자하・시오히라・카네구스쿠・테루야・이토만의 9곳의 마을이 되었습니다. 타카미네 촌은 코하쿠라・나시로・이토스의 세곳을 마카베로 보내고, 카네구스쿠 촌에서 나카구스쿠・사키나카구스쿠의 두곳을 편입해, 「와타리키나」・「게루」・카미자토・「쿠비리」・나카마의 다섯개 마을을 가까운 마을로 병합시켜, 요자, 야코(이후 오오자토) ・쿠니요시・마에자토의 네곳의 마을이 되었습니다. 마카베 촌은 카네구스쿠 촌에서 아라카키・이시키의 두곳의 마을을 타카미네 촌에서 고하쿠라(이후 고하구라) ・나시로・이토스의 세곳을 편입해 키나・나카마 두곳을 가까운 마을로 통합하고, 마카베・「아가루이」(이후 우에구스쿠)・마에히라・아라카키・이시키・나시로・코하쿠라・아사토・이토스의 아홉개 마을이 되었습니다. 캰 촌은 「사키」마을을 폐지하고 캰・후쿠치・야마시로・쓰카자토・카미자토의 다섯개 마을이 되었습니다. 마부니 촌은 마부니・오도・코미지(이후 코메스) ・이시하라・이레이의 다섯개의 마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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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의 변천

이토만 마을의 성황

写真 :이토만 마을의 성황

메이지 정부는 중앙집권의 전단계로 1872년 9월 14일에 류큐반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1879년 4월 4일에는 류큐반을 폐지하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각 촌의 사무는 예전 그대로 였습니다.

1897년에 촌도제 규정을 공포함으로서 이전의 촌 반쇼는 촌 야쿠바로 개칭되고, 촌장이하의 관리직은 페지 되고 촌장, 출납공무원, 서기관 및 촌두등이 새로 임명되었습니다.

1908년 4월 1일 시행된 오키나와 도서전촌제에 의해 이토만은
카네구스쿠의 이로촌에서 분리되고, 전제를 펼쳐 오키나와에서 유일의
「마을」이 탄생하였습니다.
각 촌은 촌제를 펼쳐 카네구스쿠촌은 카네구스쿠 마을 타카미네촌은 타카미네 마을, 마카베촌은 마카베마을, 캰촌은 캰마을에 마부니촌은 마부니마을로 개칭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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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만 마을의 발전

카네구스쿠 마을사무소

写真:카네구스쿠 마을사무소

 

이토만은 친족 집단으로부터 시작, 근세에들어 농업으로부터 어업으로 점차 주된 활동이 바뀌어갔고, 이후 메이지 초에는 929가구수와, 인구 5, 300명 남짓 되고, 슈리•나하에 이어 큰 마을로 발전하였습니다.

시를 중심으로, 이토만 경찰서•이토만 우체국• 나하구 재판소, 이토만 출장소(등기소) 등의 관공서가 설치되어 이토만 거리와 마차 도로,
현 관리의 철도 이토만선 등의 교통도 정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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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만 어업의 발전

죠과로 출항을 기다리는 사바니g

写真:죠과로 출항을 기다리는 사바니g

 

이토만의 전통적인 어업은, 이토만의 서해안에 발달한 리후를 어장으로 하는 안브시라 불리는 연안 어업이었지만, 상어낚시, 오징어낚시, 날치 전락망이라고 하는 근해 어업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1884년에 수중 안경이 개발 되고 나서는, 잠수를 주로 하는 판타타카나 아기야 라고 불리는 그물어업으로 발달하였습니다.
사바니가 구리선으로부터 박주로 개량되어 한층 박차를 가했습니다. 잡힌 물고기는, 소비지인 나하등으로 옮겨지고 카미아키네에서 판매하였습니다. 조직적인 어업 경영인 아기야에서는, 많은 이치만안마(여성) 등이 와타쿠사(개인 재산)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마르크스 경제학자의 가와카미 하지메가 「류큐 이토만의 개인주의적 가족」으로서 논문 발표한 것에 의해, 많은 연구자들이 이토만에 흥미를 갖고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아기야의 발전은, 근해의 어장의 고갈을 초래하였고, 오키나와 본토 주변에서 미야코•야에야마에, 그리고 본토로 어장을 필요로하며 전개시켜 나아갔습니다. 또, 제1차 대전 후에는 남양 제도•필리핀•싱가폴로 많은 사람들이 객지 벌이를 하러 오키나와를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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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과 문중묘

1935년에 보수된 코우치바라・이카히기바라류문중묘.

写真;1935년에 보수된 코우치바라・이카히기바라류문중묘.

 

각 마을을 예전부터 구성해온 사람들을 진츄라고 합니다. 진츄는 하라, 또는 문중이라고 칭하며, 부계친족조직을 조직해, 한곳의 묘를 공동으로 사용합니다.

이토만시에는 많은 문중의 묘가 있고, 오키나와 최대의 문종묘로 알려진 코우치바라・이카히기바라류문중묘는 그 중 대표적인 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묘는 형, 여동생, 사촌의 자손만 사용 할 수 있고, 혈연 공동묘입니다. 1684년의 묘비에는 우에하라 아키테 페친의 8형제와 킨죠치쿠도의 3형제와 자손의 묘를 분묘한 기록이 있습니다.

무덤을 만든 당시부터 1868년까지 토시묘는 한 개의 작은 카미쿠 묘였는데, 근대가 되어 자손이 번영하고, 사망자수도 증가함으로 인해 1개의 무덤에 세골까지의 처리기간을 맞추기가 어려워지게 되어, 시체가 자연스럽게 부패될 수 있도록 두기 위해 시르히라시묘를 1869년과 1901년, 1911년에 각 각 1개식 증설했습니다. 1935년에는 도시묘를 현재 보고 있는 큰 묘로 새로 바꾸는 것과 동시에, 한 개의 시루히라시묘를 증설하고, 무덤의 지붕 모양을 거북이 등껍질 모양에서 하후형식의 집모양의 무덤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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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쟁

깨진 기왓장과 모양이 변한 산티모 주변

写真:깨진 기왓장과 모양이 변한 산티모 주변

 

1944년 10월 10일 나하 중심에 미군의 공중폭격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해에 들어 공격은 더 심해졌고 3월 23일에는 오키나와 본토에 맹렬한 폭격이 시작되었습니다. 3월26일에 케라마제도, 4월 1일에 요미탄, 카데나의 해안을 따라 오키나와 본토 상륙과 동시에 순식간에 오키나와의 절반이 점령되었습니다.
80일정도에 그친 오키나와전쟁에 있어 전사자가 미군이 약 만명인것에 비해 일본군은 9만명, 오키나와 현민은 10수만명이라고 합니다.

이토만 시민 전몰자 이토만쵸 1446명, 카네구스쿠 1547명, 타카미네 1521명, 마카베 1979명, 캰 625명, 마부니1169명으로 합계 8287명입니다. 당시 인구의 약40%의 소중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The number of Itoman City citizens who died in the war totaled 8,287, with 1,446 dying in Itoman Town, 1,547 in Kanegusuku Village, 1,521 in Takamine Village, 1,979 in Makabe Village, 625 in Kyan Village and 1,169 in Mabuni Village. Just under 40% of Itoman's population at the time lost their precious l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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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기왓장 더미 속에서 이토만의 부흥

이시키토도로키동굴의 구출

写真:이시키토도로키동굴의 구출

 

동굴과 무덤에서 구출된 주민은 수용소생활을 마치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소중한 생명을 잃고, 재산도, 깨진 기왓장으로 변해버린 고향에서, 슬픔에 취할 겨를도 없이 고향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토만초를 중심으로 「이토만지구(이토만시)」가 생겼고,
나시로의 미군 캠프에는 남부구, 고메스 일대는 마와시 마을이 설치되었습니다. 특별히 많은 주민을 잃은 마카베, 캰, 마부니 3곳은 1946년 4월 4일 하나의 마을로 합병해 미츠와 마을이 되었습니다.

전쟁 후, 가장 먼저 학교교육도 재개하였고, 육상경기, 야구등의 스포츠가 황폐한 민심을 북돋기 위해 활발히 이러어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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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 3촌의 시기

항구 준설로 생긴 어구 시가와 매립지

写真:항구 준설로 생긴 어구 시가와 매립지

 

1950년대는 시구의 1초 3촌적인 고향 재건에 힘을 쏟았습니다. 각 마을의 부흥에 따라 많은 전몰자의 유골이 수집되었고 각지에 위령탑이 세워졌습니다.

1952년에는 류큐정부가 창립, 정치, 교육, 농수산업 등 생활환경의 기반정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토만 거주지의 매립지 사업과 항구 정비, 외도항로가 설치되고, 잠시나마 오키나와에서 가장 상공업의 발전이 눈에 뛰게 성장하기도 했습니다.

전쟁 후 세워진 가건물 학교가 콘크리트의 새로운 학교로 세워지고, 각 지역의 라디오가 설치되어 초와 마을, 농협의 광고 활동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전쟁 후 오키나와 세대변화의 시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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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병 신 이토만초의 탄생

미츠와 관공서에서 이토만 관공서 미츠와지소에 간판교체식

写真:미츠와 관공서에서 이토만 관공서 미츠와지소에 간판교체식

 

이토만초, 카네구스쿠 마을, 타카미네 마을 및 미츠와 마을은 행정과 재정의 여력이 부족하여 면적, 인구, 산업, 그 외의 사정에 제대로 실행을 할 수 있는 자치운영이 적절하지 못한 규모였습니다. 그래서 행정운영과 합리적이며 능률적인, 그러면서도 재정력을 강화하는 것과 함께 문화 산업도시의 건설을 목표로 1961년 10월 1일에는 이토만초, 카네구스쿠 마을, 타카미네 마을 및 미츠와 마을을 폐지, 새롭게 이토만초가
탄생하였습니다.

이토만 어항 북쪽에 카와지리 매립지 사업과(1차 매립지) 이토만 어항 준설과 함께 소방 서쪽 매립지 사업(2차 매립지)가 준공되고, 시구역의 확대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합병 5년째에는 초 예산이 100만 달러의 큰 단위를 넘어, 드디어 초의 행정이 기능을 시작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등판무관 자금의 의해 류큐 미국 문화회관과 각 지역의 공민관을 세우는 등, 사회 자본의 설비가 순조로이 진행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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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도 실행, 일본으로 복귀

교통제도 변경 전의 이토만 로타리

写真:교통제도 변경 전의 이토만 로타리

 

<p산업발전과 기반시설의 충실, 주민 생활의 향상 위해 합병 10년을 맞이하는 1971년 12월 1일에는 시제도의 실행하고, 새로운 이토만 시가 시작 되었습니다.
전쟁 후 27년간 미국의 관리에 지냈던 오키나와는 1972년 5월 15일 일본으로 복귀 하였고, 신생 오키나와 현이 되었습니다. 통화도 달러에서 엔으로 바뀌었고, 현민 생활도 많은 부분에서 변화하였습니다. 다음해 1973년에는 일본으로 복귀 기념으로 국민 체육대회가 개최되었고, 2년 후인 1975년의 여름에는 국제 해양 박람회가 개최되는 등 오키나와 전체가 뜨거워졌습니다.

한편, 시민 생활도 향상되고, 생산의욕도 고조되고, 산업축체 등이 확대, 충실이 되어가며, 사탕수수 가격관철농민 대회도 처음으로 열렸습니다. 그리고 신 이토만 어항 증축공사와 공유 수면 매립지 사업(제 4차 매립지)도 진행되었습니다.

1977년에는 전몰자의 33기 위령제가 엄숙하게 진행되었고, 이 위령제를 통해 어두웠던 시대의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그 다음해인 1978년 7월 30일에는 오키나와 현의 교통체제가 일제히 변경, 이때까지 오른쪽 통행이었던 것을 왼쪽통행으로 변경, 로타리 주변의 거리 모습도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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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차 매립지와 새로운 전개

정비가 진행중인 니시자키초

写真:정비가 진행중인 니시자키초

 

1980년 5월 22일 이토만시 토지 개발 공사 시오히라지 공유수면 매립지 사업(제4차 메립)의 허가가 교부되었습니다. 만 4년의 긴 시간과 총 공사비 360억엔을 들여, 총면적 268 헥타르라는 대규모 매립지가 1984년 6월 19일에 완공되었습니다. 매립지에는 수산 식품 가공단지, 중소기업단지등을 유치 하고, 주택분양, 공영 주택, 교육시설, 운동 공원등이 배치 되었고, 문화적인 새로운 마을「니시자키 초」가 탄생했습니다.

1987년의 카이호국민 체육대회에서 니시자키 야구장과 종합체육관을 주경기장으로, 소프트볼과 배드민턴 대회가 열렸습니다.

풍요로와진 생활을 지내면서 평화와 건강, 환경문제들을 생각하는 의식도 고조되어 「태양과 자연과 기도의 마을」이토만시로서 새롭게 마을 만들기 시작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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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전망하며

신청사 완성예상도(남쪽)

写真:신청사 완성예상도(남쪽)

 

제 4차 매립지 사업의 의해 탄생한 「니시자키초」를 중심으로 상업활동과 문화활동이 크게 전개 되던 중 1990년과 이듬해 1991년에는 오키나와 수산고등학교 나인이 전국 고등학교 야구대회에서 2년 연속의 준우승은 시민에게 큰 꿈과 희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오키나와 전쟁에서 잃었던 자연을 회복시키고, 「자연」에 둘러싸여 풍요로우며, 정감이 넘치는 환경을 조성해 「제 44회 전국 수목제」가 천황과 왕후 두분께서 참석해주셔서 1933년 4월 25일에 개최 되어, 오키나와전쟁 마지막의 땅 「이토만시」가 전국에 주목되었습니다. 같은해 12월 1일에는 평화도시 선언과 전쟁중의 초등학교 아이들 소개가 연으로 미야자키 현 츠노쵸와 자매도시 제휴를 맺었습니다. 1995년 6월 23일에는 국적, 군인, 비군인 관계없이 오키나와전쟁에서 돌아가신 모든 분들의 이름을 새긴 「평화의 초석」이 세워지는 등, 마부니를 중심으로 세계의 변하지 않는 평화를 기념하는 거점의 정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쪽 해변 공유주면 매립지 사업을 시작으로, 신청사와 시민회관 건설, 국영지댐 사업등 21세기를 전망한 새로운 마을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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